참 교묘 하다는 생각이 든다. 약삭빠르고 치밀하다. 허점을 파고 드는 야비 함도 있다.
나에게(누구나에게 일 수 있지만) 외로움이란 배척하고 싶은 대상이다. 가까이 하고 싶지 않고 친하고 싶지 않다. 이미 홀로 많은 시간을 보내왔기에 물리적인 외로움은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많이 접 할 환경이었다. 그래서 더욱 그 녀석을 배척하려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적어도 그런 노력을 했다면, 동일한 환경에서 상대적으로 외로움이 덜 접근 했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반문을 하고는 한다.
아침 일찍 아내는 봄 꽃 맞이를 간다고 친구와 남쪽을 떠났다. 그런 그녀에게 평소와 같이 호기 있게 지폐 몇 장을 손에 쥐어주며 맛있는 점심이라도 먹으라고 했다. 그리고는 별러오던 봉안당에 비치할 사진을 가지고 어머님 모신 추모공원으로 갔다. 손을 꼽아보니 하늘 나라로 가신지 49일 째다. 어머님의 의례로 보면 나름 의미 있는 날이지만, 자식들의 입장으로 보면 긴가 민가하며 보내야 하는 기념(?)일이다.
화장장과 함께 있는 그곳에는 오늘도 많은 분들이 예를 치루고 있다.
어제 지인의 문상을 갔다가 매스컴에서 본 기사가 있어 장례를 치루는데 어려움이 없느냐고 물었다. 요양병원에 계시다가 오전에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단다. 당연히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지. 그리고는 장례식장으로 모시려 하니 빈소가 없다고 한다. 하루를 허허 로이 보내고 겨우 장례식장을 잡아 빈소를 마련한 후 다음날 발인을 해야 하는데, 화장장 또한 만석이다. 강원도의 소도시가 고향인 고인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화장이 아닌 매장을 택하였다고 한다.
직원에게 사진을 맡기고 봉안당으로 오르니, 누군가 애절하게 고인을 그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동안 씩씩하다고, 섭섭할지 모르지만 이미 돌아가신 분이니 어쩔 수 없다고, 평소에 못한 애닯음을 울음으로 보상할 수 있냐고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평정심을 잃지 않았던 설움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솟구치는 눈물에 갑자기 황당함이 앞선다. 이미 솟구친 눈물이 쉽게 가라 앉지 않는다.
산을 오르고, 친구를 만나고, 책도 읽고, 자전거를 타며 빈틈을 주지 않고 애써 외면했던 외로움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그건 외로움 맞다. 헌데, 돌이켜 보면 그 외로움이란건 환경에서 비롯되는게 아닌가?
아직 시간을 같이 할 아내가 있고, 결혼한 큰 녀석은 나름 제길 찾아가고 있고, 작은 녀석은 직장생활 충실하게 하고 있으니 외형적으로 부족한 것이 없이 보이는 내게도 빈틈을 찾아 들어오는 외로움이란 놈. 교묘하다고 할 수 밖에 없지 않나?
이혼을 하고 혼자 사는 친구, 역할을 바꾸어 아내가 일을 하고 하루 종일 집에 있는 친구, 아직도 경제활동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친구 그리 많은데 나만 절실하게 느끼는 외로움인가?
현직에 있을 때는 일로 인하여 가족과 떨어져 있음에 느끼는 외로움은 감수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감수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헌데, 불과 일손을 놓고 한 두 해 밖에 지나지 않은 지금 내가 느끼는 이 외로움의 실체는 무엇일까?
인생은 길고도 짧다.
그렇다.
아직 터득하지 못한 인생을 겸허하게 맞이해 나갈수 있도록 마음이라도 단단히 다잡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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