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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03] 떠나든, 머물든 –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특별한 은퇴 이야기 –

루커라운드 2021. 4. 3. 21:33

 

생활의 우선 순위가 있다. 그 순위를 정해 놓지 않는 다면, 습관이 그 순위를 대신 할 것이다. 게으르게 늦잠을 잔다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선순위가 늦잠이 되는 것이다. 우선순위의 순서도 마찬가지이다. 해야하는 것, 해보고 싶은 것 중 어떤 것을 먼저 할 것인가?

우선순위의 목록이 너무 많은 것도 문제가 되긴 마찬가지이다.

해보고 싶었던 것을 은퇴 이후로 미루어 놓았기 때문에 은퇴 후에 모든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비 논리적이고 심지어는 미련한 짓인지 깨달아 가는 과정에 있다. 설령 깨달았다 하더라도 실천을 하지 않는다면, 깨닫지 못한 것과 무엇이 다를까?

‘태백산맥’ 책을 3권 빌려 대여 기간인 2주면 충분한 기간임에도 이곳 저곳에 정신을 팔려 한주를 연장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결국 반납을 하는 과정에서 동일한 책은 일정기간(3일?)내에 재 대출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걷는다’ (베르나르 올리비에 저)는 산티아고를 가기 전에 읽어야 할 필독서로 기록을 해 놓았다. 은퇴에 관한 책을 검색을 하다가 저자의 ‘떠나든, 머물든 –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특별한 은퇴 이야기 –“ 를 빌려 읽게 되었다.

제목  ; 떠나든, 머물든.
지은이  ; 베르나르 올리비에 저
옮긴이  ; 임수현 옮김
펴낸곳  ; 효형출판사

일손을 놓게 되는 사람들이 은퇴라는 단어 앞에서 이리재고, 저리재고, 머리를 굴려 보지만 일목요연하게 은퇴의 의미나 방법을 동일하게 적용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사람의 평소 생활환경이나 가치관 그리고 경제적여건과 건강, 가족구성원의 환경까지도 은퇴라는 것에 변수로 작용하기 때문 일 것이다.

저자는 주로 일을 놓고 해야 할 것이 없어졌을 때 오는 상실감에 대하여 많은 고민을 한다. 그의 배우자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자식들은 그들의 손에서 떠났다. 아직도 체력은 일손을 놓을 만큼 떨어지지 않았으니 남은 기간을 무엇으로 보내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은퇴후의 일을 찾기 위해서 산티아고를 걸었고, 거기서 얻은 영감으로 실크로드를 걷게 된다. 미국이나 영국에도 트래킹이나 걸을 수 있는 많은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형적으로 열악하고 국가간의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며, 문화가 판이하게 다른 실크로드를 택한 건 걷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은퇴 이전의 처절했던 그의 행적(가난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고 열여섯 살 때부터 토목공, 항만 노동자, 가게 점원, 포도주 외판원, 체육 교사, 기자를 두루거침)을 은퇴후의 휴식이 아닌 해보고 싶었던 일을 하면서 진정한 자유를 얻는 과정을 기술한 이야기 이다.

그가 쓴 글 중 되새김하려 가능한 많은 부분을 발췌하여 기록을 해 보았다. 저자와 비슷한 나이와 환경(은퇴자)의 입장에서 그의 글은 많은 공감을 하게 만든다. 하지만, 당연하고 맞는 말이라 하더라도 굳이 그 말을 누구에게 전하여 같은 공감을 강요하기에는 썩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은 공감보다 더 깊은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인가 보다. 

‘우리가 늙고 싶어서 늙지 않듯, 너희도 젊고 싶어서 젊은 것이 아니다.‘ 라는 말이 충분한 공감이 가지만, 그것을 젊은이에게 하고 싶지 않음과 비슷한 이유라고 하면 적절한 비교가 될 수 있을까?


어느 인터뷰에서, 올리비에는 “인생의 모든 시기에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건 내 잘못이 아니야.' 은퇴란, 그와는 달리, 전적으로 당신의 책임이다. 만약 당신이 그 시기를 망친다면, 당신은 다른 누구에게도 돌을 던질 수가 없다.”고 말했다. [8 Page]

“늙는다는 건 멋진 일이지만…… 그렇게 나쁘게 끝나는 게 유감일 뿐이다”(프랑수아 모리아크 François Mauriac, 1885∼1970, 프랑스의 소설가) 라고 말한 바 있다. 어차피 그럴 바에는, 발에 족쇄를 차고서 슬픈 최후만 기다리지 않는 게 더 낫다. 영원한 휴식이 우리를 기다리는데, 무엇 때문에 소위 휴가 라는 걸 빙자해 오랜 겨울잠에 든단 말인가? [12 Page]

'제3기라고 불리는 이 시기는 인생 전체를 통틀어 가장 진지한 사건이다. 이 시기를 긴 휴가와 혼동하는 일은 나로선 이해할 수 없거니와, 심지어 마치 휴식처럼 간주한다면, 이는 큰 실수다. 당신이 회사를 떠나야 할 때, 사람들은 심지어 은퇴할 나이가 되기 전에도 당신을 출구 쪽으로 떠밀며, 그리고 '노동의 가치' 따위의 뻔한 말로 찬양하며, 당신에게 샴페인을 권하고 DVD 플레이어 따위를 선물한다. 그것이'충분히 누릴 자격이 있는 휴식'이다. “늙은 일꾼 이여, 이제 쉬시라. 당신은 그럴 자격이 충분하다. 앞으로는 매일매일이 일요일일 것이다. 허튼 소리, 빈 시간을 메우는 데 충분히 공을 들이지 않는다면, 첫 달 첫 날부터 목요일이건 일요일이건 날마다 흐리고 공허하고 슬플 것이다. [15 Page]

'세상에 흔적을 남기기 바란다면, 그 세상과 연대를 이루어야 한다.” (시몬 드 보부아르 Simone de Beauvoir, 1908~1986.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철학자, 여성운동가) 십 년 동안 사색하고서 나는, 오늘 은퇴자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인생은 60에 시작한다고, [18 Page]

예순다섯 살까지 계속 일할 수도 있었다. 공식적인 보고서들은 우리가 더 오랫동안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확실히 그렇긴 하지만, 그럼 도대체 언제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나? 사람들은 평생 부모님을, 선생님을, 사장을, 배우자를, 자식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일했고, 이성의 이름으로, 집세와 국가의 이름으로 땀을 흘려왔다. 그만, 그만하면 됐다. 자신을 위해 일할 권리를 찾을 때가 있는 것 아닌가……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서 그 권리를 이용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서 말이다. [27 Page]

난 궁중 쪽(왕궁)이 아니라 정원 쪽(농부)에 역사를 설명한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 1902~1985. 프랑스의 아날학파 역사학자)의 책들을 탐독했다. 유명한 산책로를 택하거나, 걷기 위해서 걷는 것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내게 필요한 건 사소한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 였다. 내가 곧바로 떠올린 것은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Santiagode Compostela 였다. [36Page]

장 위에서,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어떤 이는 예전의 순례자가 그랬듯 해변에서 그들의 낡은 옷을 태워버리고 파도에 몸을 씻기 위해 상징적으로 피니스테라 Finisterra, 길의 끝까지 가기로 결정했다. 그들보다 훨씬 적은 수이긴 했지만, 또 어떤 이는 다른 방향으로 다시 길을 떠나갔다.

걷는 일에 대해 전혀 모르고 한곳에만 머물러있는 사람은 그것이 주는 행복을 무시하고 단지 걷는 게 힘들다고만 생각한다. 속죄를 위해선 걷는 일이 당연히 고통스러워야만 한다고 생각한 완고한 이, 그리고 자기도 모르는 연민에 이끌려 움직인 어떤 이는 콤포스텔라에 이르기 50킬로미터 전에 푯말들을 박아 놓았다. 그래서 이런 메시지를 전하는 작은 말뚝을 많이 볼 수 있다. 

“이제 곧 당신의 고통은 끝이 납니다.” 나의 느낌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나는 새로운 기쁨과 환희에 차있었다. 처음에 나는 이런 말뚝을 보았을 때 깊은 분노마저 느꼈다. 화가 나서 그 위에 오줌을 누었던 걸로 기억한다.

결국 내 바람은 계속 걷는 것이었다. 하지만 발걸음을 어디에 둘 것인가? 이미 밝힌 바 있듯이, 내겐 역사가 점철된 길이 필요했다. [79Page]

나는 철저한 걷기 원칙주의자라서 '나의 실크로드에서 단 1미터라도 남의 도움 받는 걸 용납할 수 없다고, 그들에게 설명 해줬어야 했을까? 가끔 안전 문제로 어쩔 수 없이 트럭을 타게 되면, 나는 다음 날 아침 길을 거슬러 올라가 전날 내가 그 냄새 나는 차의 힘을 빌려야 했던 곳을 정확히 찾아내 그곳에서부터 다시 길을 떠나곤 했다.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걸 보면 대범한 사람은 비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도 고칠 방법이 없다. 내가 매일 거쳐간 수십 킬로미터의 거리, 만난 사람, 꿈과 같은 경치가 내 노년의 재산이다. 어쩌면 난 수전노 아르파공 17세기 프랑스 희곡 작가 몰리에르가 쓴 〈수전노>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내 기억의 작은 상자를 고이 끌어안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122Page]

빈곤하게 사는 이 주민들은 우리의 부를 부러워하지만, 비록 우리가 가난을 몰아냈다고는 해도 그들이 느끼지 못하는 다른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음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실업, 죽음, 도둑, 경찰, 이웃, 세무 관리, 주가 폭락, 자동차 사고에 대한 두려움, 아이를 맡길 탁아소를 찾아야 한다는 두려움 같은 것 말이다. 
그곳 정치인의 화두가 삶의 수준을 서양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것이라면, 우리네 나리들의 그것은 우리를 좀 더 안전하게 만들어주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말 그대로 보수적인 사람들이라서, 우리의 부와 장점과 기득권이 유지될 거라는, 즉 확대될 거라는 확신을 좇는 존재다. 그 여정에서 우리가 방치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별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128Page]

아무리 반복해도 지나치지 않은 사실인데, 걷는 것은 육체적인 운동이 아니라 정신적인 운동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근육 하나하나가 영양을 공급받고 단단해 지고 부드러워지면, 그리고 몸이 산책을 통해 재구성되면, 몸은 애쓰지 않아도 움직여 자연이 자신에게 부여한 기능을 부드럽게 완수한다. 
걷는 일에는 어떤 자격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134 Page]

그는 단지 문만 연 게 아니라 자신의 마음과 찬장까지도 연 것이다. 그의 가장 사적인 질문은 이런 것이다. “당신 어디서 오는 거요?” 환대는 그저 보여주려고만 한다. 
주인이 당신에게 겸손하게 하는 부탁은 자신에게서 당신의 존재를 빼앗지 말라는 것이고, 하루, 일주일, 조금만 더 오래 머물러 달라는 것이다…… 순진한 그는 그런 부탁이 얼마나 엉뚱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우직하고 가난한 그는, 시간이 돈이며 돈이 모든 것보다 우선한다는 걸 알지 못한다. 동지애와 우정 만을 거래하는 그는, 지극히 현실적이며 물건값을 너무나 잘 아는 우리네 사회에선 그런 가치들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다는 걸 알지 못한다. [137 Page]

계획이 없는 사람은 이미 죽은 것이다. 비록 그가 모든 계획을 실현하지는 못할지라도, 내가 심은 떡갈나무가 탁자로 만들어질 만큼 충분히 자라려면 300년은 기다려야 한다. 아마도 나는 그 일을 내 손자와 손녀에게, 또 그들의 아이들에게 맡겨야 할 것이다. 다른 계획들로 말하자면, 그것들이 빛을 보느냐 못 보느냐 하는 건 중요하지 않다. 다행히도 하루하루가 너무 짧다고 생각하며 내가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213 Page]

은퇴자로서 더 이상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할 수도 없게 되어 내가 흔들의자에 앉아 몸을 흔들며 되새겨볼 때, 오직 내 자신만이 책임져야 하는 삶의 이 마지막 단계는 내게 후회를 안겨줄 것인가, 혹은 행복을 느끼게 해줄 것인가? 한마디로 말해서, 십 년 혹은 50년 전보다 지금의 내가 더 나아졌을까? [216 Page]

예순 살은 삶이라는 연회에서 후식을 먹는 시간이다.
인간 존재가 만들어내는 불꽃놀이의 마지막 마무리다. 그동안 받았던 상처를 아물게 하고 스스로 획득한, 혹은 얻은 행복을 음미하는 데 그렇게도 긴 여정이 필요했다. 예순살, 새로운 삶이 우리 앞에 열린다. 그것을 가능한 한 제일 좋은 방법으로 채우도록 하자. [222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