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걸어서 5분 정도의 거리에 해발 500M 도 되지않는 수리산이 있다. 그렇게 낮은 산 임에도 며칠째 지속되는 장마기간중의 하루인 오늘은 운무가 산허리 자락까지 감돈다. 은퇴 한달 하고 일주일, 지금 내 마음은 저 운무 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다.
예상했던 것이 빗나간 건 몇 건 되지 않는다. 은퇴 전에 이미 예상했던 일이지만 현실로 부딪히니 낯설고 불안하기만 하다.
매월 주기적으로 열어보던 은행 구좌의 통장엔 이번 달은 입금이 되어있지 않았다. 대신 국민연금과 아직 신청을 하지 않은 퇴직연금, 그리고 실업급여가 대신 할 것이지만 몇 십년 동안 번복해 오던 월급날의 풍경이 낯설기만 하다.
지금 이 시간쯤 이면 급히 출근을 서두르던 때와 달리 여유 있는 시간 마저도 여유로 느끼지 못하고 익숙하지도 않다. 누군가 뭐라고 하지 않는데도 이 여유를 어떻게 사용 할 것인가 불안하기 까지 하다.
퇴직 하는 시점에는 인생의 대부분을 경험하여 알고 있기 때문에 퇴직 후의 생활은 시간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보낼 것만 고민하면 별 것 없을 것으로 생각 했었다. 단지, 몇가지 새로운 시스템만 적용하면 되니, 퇴직한 다음날부터 몸과 마음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한달이 지난 지금 나에게 익숙해 져 있던 것은 모두 없어지고 주변이 온통 새로운 것들이다. 설거지, 빨래, 친구들과의 만남, 자투리 시간을 메꾸기 위한 조급함, 남겨진 시간들에 대한 불안감, 어느 것 하나 안정된 것이 없다.
(아마도 이 부분이 은퇴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배경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삼시세끼를 한끼라도 해결해보겠다는 생각, 그리고 사회생활 할 때 하지 못했던 가사를 분담해야 하겠다는 생각은 누가 제안한 것이 아니고 내가 스스로 세운 계획인데, 단순하게만 생각했던 일상의 일들이 그리 단순하지만 않다. 생소함과 지속 번복해야함에 몇일 지나지 않아 부담을 느끼게 되었다)
지금껏 오랜 사회생활로 인한 자신감은 오간데 없고 모든 것이 새롭다. 완벽(?)에 가깝게 처리했던 회사 일과는 달리 한 건도 완벽하게 해 낼 수 없는 자신을 보며 앞으로의 날들이 걱정이 되기도 한다.
말은 은퇴라고 하면서 너무 많은 해야 할 것들을 머릿속에 구상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사회생활에서 은퇴라는 변곡점에 주어야 할 변화에 적응이 안되는 걸까? 가족들에게 나는 어떤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걸까? 가족들은 내가 어떤 모습으로 행동하길 바라는가? 가족이 어떻게 생각하든 우선 내가 주가 되어야 하지 않나? 생각이 꼬리를 문다.
시간만 나면 어디론가 떠나 가리라 다짐하며 얼마나 고대 했었는데, 완벽하게 준비하지 못했 다는 핑계로 막상 떠나려 하니 뭔가 불안하기만 하다.
생각이 엉키면 걷는다. 걸으면 풀릴 듯한 실마리를 찾아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 생각은 다시 엉켜 버린다. 은퇴를 한 후 사람들을 만나고 있지만 자유로움 보다는 의무감에 만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오늘도 이러한 잡념들을 탈피하고자 김밥 한 줄과 생수 두 병을 사서 배낭 속에 넣고 산의 들머리로 가는 도중, 구에서 운영하는 공공 수련관 건물을 지나간다. 번듯하게 지어진 건물 내부는 평일임에도 불이 꺼져 있고, 주차장에는 운행을 멈춘 셔틀 버스가 줄지어 서 있다. 바쁘게 움직여야 할 시간에 저리 방치 된 듯 서 있는 버스를 보니 코로나가 우리주변의 생활 패턴을 얼마나 많이 바꾸어놓은 것인지 실감이 된다. 산 입구에 들어서자 마자 주변 분간 할 수 없을 정도로 안개가 자욱하다. 마치 내가 그토록 기대했던 2막 인생이 기대에 어긋나 있는 내 주변의 환경과 너무 흡사하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나마 은퇴 전 계획했던 일중 생각과 비슷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은 걷고 오르는 일이다. 걷고 오르는 과정에 모든 정신을 집중할 수 있는 것만도 다행이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정신 집중에 만족하려 은퇴를 했다면, 지금보다 더욱 정신을 집중하게 만드는 현역에서 왜 은퇴를 하려 애를 썼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몸은 피곤한데 잠은 오지 않는다. 시간이 무료하면 낮잠이나 자겠다던 희망은 이제는 더 이상 꿈꿀 수 없는 꿈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다시, 은퇴 전 해보고 싶었던 기록들을 하나 둘 실천해 보지만 그때의 생각한 것처럼 재미있어야 한다는 생각과 비교를 하면 시들해 진다.
오늘은 안과에 갔다. 왼쪽 눈 주변에 염증 비슷한 것이 생겼다. 의사 말씀이 면역력이 떨어지면 생기는 일종의 바이러스에 의한 염증이라고 한다. 한동안 생각을 정리하려 무리하게 걷고 산에 오르며 몸을 혹사시킨 것 같다.
은퇴는 물질적인 은퇴 보다 마음을 다잡는 것이 더 우선이라는 것이라는 생각을 뒤늦게 해 본다. 은퇴에 대한 너무 많은 기대는 은퇴후의 생활에 해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 본다. 은퇴 전 준비했던 계획이나 마음가짐을 지금 이 시점에 처음부터 다시 계획해야 하는 건 아닌지 혼란 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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