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터미널
자정이 가까워 오는 강남고속버스 터미널, 네온으로 빛을 발하는 옥외광고판에서는 어디론가 떠나고픈
충동을 느끼게 하는 광고 화면들로 가득 차 있었다.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을 떠나기 위해 이곳을 찾았었던 날들이 얼마만인가?
움직이기 쉽다는 이유로 관광버스를 이용한 때문에 나름대로 시간표를 점검하고 버스를 기다리며낮선곳에 대한 기대감을 부풀리던 때가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오늘도 고속버스를 타고 떠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은 아니다.
"아침가리골”을 중심으로 한 도보여행을 가기 위해 이 근처에서 출발하는 관광버스를 타기 위함었다.
월둔골로 가는 길
도시는 이미 겨울과의 이별을 준비하듯 며칠째 봄날 같은 낮기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엇그제 이른 아침 출근길에 버스를 기다리며 먼동이 트는 동녁 하늘의 아침과 서늘하지만 봄의 내음을
담고있는 바람을 맞으며 결코 멀지 않은 봄을 상상했었다.
두주전 “눈길 도보” 라고 해서 예약을 해놓은 이번 여행은 봄을 맞이하는 늦겨울의 여행정도로 분위기가
바뀌어 가고 있는듯 했다.
회사업무와 평소보다 늦은 취침시간으로 인하여 피곤해진 몸은 자정을 지나 한시에 출발한 조금은
불편한 버스좌석에서 꿈과 현실을 힘겹게 오가고 있었다.
비몽사몽인 와중에도 목적지인 월둔교를 지척에 둔 이름 모를 고개를 통과하며 좌..우..로 힘겹게
흔들리는 버스의 이동을 느낄 수 있었고, 잠시 조용해진 틈을 타서 곤한 잠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어둠이 걷히지 않은 이른새벽의 도보가 위험한 때문에 날이 밝을때까지 버스는 그 자리에 정지하고
있었다.
끝없이 이어진 빙판 임도
아침 일곱시가 되어가니 어둠이 걷히기 시작했다.
가뭄을 해소하기에는 부족하였지만 어제 내린 비로 맑고 달콤한 공기는 월둔교 주변풍경에 대한첫인상에 가산점을 부여했다. 월둔계곡으로 올라가는 골짜기의 좌측 능선에서는 아침운무가 계곡을
타고 흐르고 우린 그 좌측으로 놓인 임도를 따라 월둔고개를 향했다.
버들강아지는 눈을 뜨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추위로 인하여 크게 기지개를 펴지는 못하고 있었다.
살짝 기울어진 길을 따라 두시간정도 걸어 오르면서 비상용으로 준비해온 아이젠이 필요 없겠다 싶었다.
하지만,월둔고개에서 구룡덕룡으로 갈라지는 삼거리를 지나 명지거리를 들어서니 길은 흡사 너른 빙판을
연상케 했다. 살짝 기울어지고 얼어붙은 빙판길이 한시간정도 이어졌다.
그 한시간여 동안을 아이젠과 빙판길이 닿아 걸을때마다 발생하는 바지작..바지작 거리는 신비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바지작..바지작..결코 기분나쁘지 않은 그 바지작 거림이 지금도 무릎 끝을 통해
전해져와 온몸에 전율이 느껴지는 듯 하다.
좌측 혹은 우측 골자기에서 내려오는 작은 계곡과 주계곡이 합류하는 지점에서는 콘크리트로 된 다리를
만날수 있었다.
계곡의 급류가 휩쓸고 간 자리에 다리는 본체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다리고유의 역할은 할 수 없을
정도로 주변이 붕괴된 다리를 몇 개나 건넜던가?
아직은 계곡의 얼음이 녹지 않을 시점이어서 계곡을 건널때면 얼음위를 걸어 계곡을 통과 하리라는
예상은 전날 제법 많이 내린 비로 인하여 얼음위로, 일부는 얼음을 녹이며 흐르는 계곡을 건너게
만들었다.
얼음위에 돌다리를 놓고 혹은 신발을 벗고 얼음이 녹아 만들어진 제법 차듸찬 계곡물을 가로지르기를
대여섯번..
조경동 약수, 육노루골, 버드나무골, 가리왕생이골, 가르마골 평소 듣도 보도 못한 지명들이지만,
처음 들어도 정겹게 느껴지는 그 골자기들을 알게 모르게 지나친다.
잡목
임도를 따라 길~게 늘어선 잡목은 아직도 겨울의 중간에 서 있는 것 처럼 보였다.
가녀린 나뭇가지 사이로 바람이 스쳐지나가도 크게 외로와 보이지 않는 것은 많은 무리들이 촘촘히
서 있는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담양이나 남이섬의 명풍경인 메타 세콰이어 숲길이 의장대를 연상시켯다면 조금은 초라한 듯 몰려있는
이잡목들은 초조히 사열을 받고 있어보인다는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다.
하늘을 향해 서있는 그 잡목이 비록 위용은 크게 없을지라도 나름대로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의식하며
임도한켠에 늘어서 있는 것으로서 그들의 임무를 다하고 있는듯 보였다.
그 사열의 중간을 가로 지르며 잠시 그들과의 사이에 교감이 통한다면,
그들이 보는 우리의 모습 또한 부질없어 보일 수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가끔씩 밀려오던 속세의
복잡한 마음을 정리할수 있을 것 같았다.
자작나무
월둔고개에서 두어시간을 내려와 계곡의 급류가 휩쓸고 간 자리에 놓인 다리위에서 점심을 먹고
또 두어개의 다리를 건넜을 즈음 누군가에 의해 식재된 자작나무 군락이 눈에 들어온다.
아직 봄이오려면 먼, 앙상하고 가녀린 갈색의 나뭇가지가 뒤덮인 계곡의 작은터에 하얗게 군락을
이루고 있는 자작나무숲은 여행자의 눈길과 감정을 흐트러 놓기에 충분했다.
흰눈이 덮힌 혹한의 겨울 만주나 시베리아의 벌판 한켠에 때로는 창백한 빛깔로 때로는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외로이 서있어야 어울릴듯싶은 저 자작나무 숲에 대한 이상한 감정은 자작나무와
관련된 글을 끄집어 내어 볼 수밖에 없는 호기심까지 자아낸다.
더욱이 사람의 눈을 닮은 나무 줄기의 모습(옹이?)이 그 호기심을 더한다.
그 자작나무는 조경동을 지나 방동약수로 가는 산언덕의 임도변에도 그렇게 무리를 지어 서 있었다.
얼룩말이 몸을 비비고 지나간 다음,
자작나무 줄기에는 희고 까만 얼룩이 생기기 시작했다나무는 휘날리며 내달리던 얼룩말의 습생을 닮아
바람이 군락(群落) 사이로 우루루 떼지어 몰려가면 잎들이 갈기처럼 날린다
권영부 시인의 “자작나무의 사랑” 중에서
조경동
양옆으로 깍아지른듯한 산세에서 생성된 계곡에는, 얼음녹은 물과 때를 마추어 내린 비가 어우러져
옥색빛을 띄우며 겨우내 얼었던 얼음 위로 범람을 하고 있었다.
그 깊고 깊은 계곡에 담겨져 있던 물들이 내로 강으로 흘러내려 가고픈 욕망을 계곡을 통해 흘러
내려 가지 못한다면 어쩌란 말이냐. 하지만 그 육중한 유빙을 몇킬로씩이나 옮겨 놓을 많큼 자연의
섭리는 이해하려고 하면 더욱더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는 아이러니한 일들이었다.
수십리 계곡을 흐리고 내리다가 너른 대지를 처음 만난 곳은 조경동(아침가리)이다.
한때 화전민들이 제법 살았지만 지금은 폐교된 초등학교 분교와 텅빈 마을에 경작을 위한 밭이
드넓게 존재하는 곳이다.
영화 동막골의 배경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른 분지에 조용하게 들어서있는 그래서, 어쩌면 산골이 끝나고 세상으로 넓게 열리진 계곡의 끝이며
세상으로 통할듯한 그 물줄기는 또 다른 계곡을 만들어 깊은 산중으로 숨어들고 길은 다시 산위로
향하게 되어있었다. 답답함과 아늑함이 공존하는 마을이다.
비록..
그 계곡으로 이어진 아침가리골로 세상밖을 빠져나오지는 못했지만,또다른 산을 하나 넘어 방동약수에 도착한 시간은 출발시점으로부터 아홉시간,
속세에서 가지고 왔던 물욕과 스트레스가 고갈되어 더 이상의 욕심이 남아 있지 않는
그래서, 해탈되어져 있을 법한 육신만이 덩그러니 놓여져 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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