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28살의 아들.. 결국은 플랜트 공사 현장으로 떠난다. 그렇다고 아들이 최종직업으로 택한 것인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지난4년 동안 서 너번의 직장을 옮기는 과정에서 보아온 것과는 사뭇 다르게 다가오는 느낌이 있다.
부모의 눈으로 보는 아들의 모습은 항상 불안하기만 하다. 말로는 그리고 겉으로 표현하기로는 네 자신에게 맡기겠다 네 인생은 네가 책임지는 것이다 라고 말을 하지만 언제 정착을 할지, 그리고 본인의 직장에 만족을 하며 적응할지 조급하기만 했다.
겉으로는 무심한 척, 아무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을 했으나 나의 속마음을 들켜버린 건 아닌가 하는 자책감이 슬며시 밀려오기도 한다.
대학을 선택 할 때 까지만 해도, 서울의 중류 대학 정도는 가지 않을까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었다. 대학의 특성을 경험하지 못한 아빠의 입장으로 경제적인 뒷바라지가 아들을 지원하는 최선의 일이라는 생각만 했었다.
학교를 선택하는데 어떤 노력과 정보를 구해서 도움을 주어야 했었다는 후회를 한 것은 녀석이 수도권인 집에서 지방으로 한 시간 이상을 움직여야 하는 학교로 정해진 후였다.
집안의 분위기 때문인지, 아니면 진심 본인의 의사인지 재수는 물론 거의 모든 친구들이 한 해정도 하는 휴학, 그리고 병역의무로 인한 기간도 허비하지 않고 가장 짧은 기간에 졸업을 하였다. 그리고는 학교에서 추천하는 프로그램을 통하여 1년계획의 해외 인턴을 떠났다.
말이 인턴이지 국내대기업 자동차 회사의 협력업체들이 인건비 절감을 목적으로 현지인을 감독하는 단순교대업무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기술배우기를 희망했던 아들은 청년실업과 중소기업의 열악한 환경으로 사회에 대한 첫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인턴을 마치고 돌아온 아들은 휴식을 하겠다고 했다. 휴식이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 할 수가 없다고 했더니, 다른 친구들은 재수, 군대, 그리고 휴학을 하여 아직 졸업을 하지 않았으니 그들이 졸업할 때까지 휴식을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았다.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는 부설 직업훈련원을 운영하였다. 그곳을 소개하며 훈련 후의 진로는 건설분야 보다는 제조업을 하라고 조언을 하였다. 건설분야는 대부분 현장을 돌아다니며 일을 해야 하기에 한곳에 정착하여 안정된 생활을 하기 쉽지 않다는 내 경험에 따른 조언이었다.
직업훈련을 받는 동안 그나마 사회경험이 있고 평소 교류가 있던 훈련원 강사의 추천으로 건설현장의 소요인력으로 입사 요청의뢰를 받았지만, 제조업체가 아닌 이유로 사양을 했었다. 많은 사람들이 훈련원을 졸업하기 전에 취업을 한다. 제조업을 고집하던 아들은 결국 졸업할 때까지 취업을 하지 못하더니, 영세하고 작은 제조업체에 일자리를 찾았다.
그리고 1개월이 되지 않아 결국은 건설현장을 택한 것이다. 대기업의 제조업체가 아니면근무 환경이 얼마나 열악하고 그에 대한 대가가 보잘것 없다고 판단을 한 것 같다.
돌이켜 보면 수없이 많은 어려움과 열악한 환경을 거치면서, 나의 아들이나 딸들은 나와다른 삶을 살아가길 기대해 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현실은 쉽사리 희망사항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실감하게 된다.
현재와 미래에 대한 아들의 고민이 아들에 국한되지 않은 주변의 많은 젊은이들의 고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지금은 그가 주어진 환경에 잘 적응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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