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채색에 비유할 만한 친구가 하나 있다.
고등학교 2학년때 안면을 텃으니 45년 이상 되었다. 인문계와 달리 공업고등학교에 들어가면 공부 같은 것에 목숨을 거는 일들은 없다. 하지만, 일년에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네 번 있는 시험에 그나마 신경을 쓰는 친구들도 있는데, 아마도 시험 중 도서관에서 우연히 대화를 했던 것이 그와 알게된 인연이다.
같은 반도 안해봤고, 고등학교 졸업 이후 많은 친구들이 같은 직장에 입사했으나 그 대열에 함께 하지도 않았다. 그 친구의 취미가 무엇인지 그가 꿈꾸는 앞날은 어떤 것인지 특별히 우리가 왜 가끔 만나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지냈었다.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모두들 취업했지만, 그 친구는 실습을 나간 회사에 적응이 쉽지 않다며 다시 공부를 시작하여 수도권의 대학에 입학했으니 유유상종이라는 단어와 어울리지도 않는다.
그렇게 옆에 있는듯 없는듯 지내면서도 내가 휴가를 들어 왔을 때, 그 친구가 학교에서 방학을 맞았을 때 함께 했던 기억과 내가 해외 근무로 없는 동안 나의 남동생 고등학교 졸업식에 그가 선물을 사주며 졸업을 축하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러려니 했었다.
내 결혼식에는 그가 왔는지 기억에 없고, 그가 수도권 지방도시에서 결혼한다고 해서 홀로 버스를 타고 가서 축하해 주었던 기억이 있다. 결혼 이후 직장이 마음에 들지않아 방황 했던 때 왜 그 친구를 찾아갔는지 알 수가 없었고, 대기업의 설계과장이란 직책을 갖고있는 그 친구가 내게 무슨 말을 해 주었는지 또한 기억에 없다.
그와 내가 담배를 피우기는 했었지만, 담배 피는 시간들을 공유해 본 적이 없었고 내가 술을 늦게 배웠지만 그는 술을 잘 먹지 못했다. 나는 등산을 좋아했지만 그는 산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가 당구를 수준급으로 친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당구를 잘못 치는 난 그와 한번도 당구장에 간 적이 없다.
참으로 이해가 안가는 상황은 그런 와중에도 주기적으로 서로 만나 안부를 확인했다. 한 두 번쯤은 그 친구 부부와 우리 부부가 식사를 한적 있지만, 솔직히 그의 아내를 길 거리에서 만나면 난 알아 보지 못할 것 같다.
은퇴가 가까워 오던 수 년 전, 휴가를 들어올 때마다 그 친구와 주기적으로 식사를 하는 것을 계기로 급격히 가까워 졌다. 그 중에는 그와 어울리는 친구들과 함께 할 기회도 있었지만 긍극적으로 서로 만날 기회를 많이 만들려는 노력을 볼 수 있었다.
최근에는 물론 다른 친구들과 동행이지만 한달에 두 번 정도 산행도 하고 또 한달에 두번 정도는 점심을 먹고 카페에 가서 이런 저런 속내를 이야기 하다 보니 언제, 어떻게 우리가 이렇게 가까운 친구가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다행이다.
그 오랜 세월을 지내오며 끊을 놓지않고 이어온 것이, 무채색이라고 화려하지 않다고 교우를 중단하지 않은 것이 오래전 만날 때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것을 소급하여 의미가 주어지는 것 같다.
그가 아들이 있는 제주도를 다녀오고, 나는 친구들과 울릉도 여행을 다녀오느라 그리고 그의 사업이 잠시 바뻐서 일정기간동안 만나지 못한 10월말 어느 날, 언제 시간을 낼 수 있느냐 전화가 왔다. 마침 주말이 가까워오니 다음주 주중이면 아무 날이나 상관없다고 했더니 아예 수요일날 만나는 것으로 약속을 하자고 했고 흔쾌히 그날로 확정을 했다.
그날 이후 갑자기 날씨가 추워졌다. 텃밭에 심어놓은 김장 배추와 갈무리를 해야 할 일들 그리고 다음주에 아내의 일정을 감안하다가 일단 일요일 늦은 오후 횡성 텃밭으로 들어갔다. 헌데, 일은 예상했던 것 보다 복잡하게(김장을 하러 갔으나, 텃밭에 심어놓은 김장재료를 사용할 수 없어 다시 집과 이천의 처남 집을 오가다 보니) 일정이 꼬였다.
화요일 저녁 늦게까지 김장은 마칠 수 있었지만, 그 외에 몇가지 할 일을 마무리 하지 못했다. 결국 약속한 수요일 아침 난 그 친구를 만나기 위해 홀로 안양으로 오고 아내는 그곳에서 머물기로 결정을 하였다.
KTX라는 교통 수단을 택하기로 했다. 우선 오가는 동안 운전에 신경을 쓰지 않으니 자유롭게 생각 도하고 음악도 들을 수가 있다. 혼자 움직이니 교통비 또한 비싸지않고, 시간상으로도 절약이 되었다. 거기다가 횡성에서 서울로 가는 KTX기차를 타는 경험을 할 수 있으니 이야말로 일석 삼조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텃밭에서 차를 이용하여 횡성역으로 이동한 후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약속한 시간에 여유 있게 도착하여 그의 차로 점심을 먹은 후 궁평항 근처에 있는 ‘야자수 마을 카페’ 에서 대화 중 오늘 움직인 나의 동선을 이야기 했다.
대화가 마무리 될 즈음 그는 나를 횡성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한다. 그냥 드라이브 하듯 차를 몰고 횡성까지 갔다가 되돌아 오겠다는 것이다. 그럴 필요 없다고, 왕복 4시간의 쉽지 않은 거리를 오가는 것이 쉽지 않다고 몇 번을 이야기 해도 그냥 그렇게 하게 놔 두라고 한다.
결국 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이젠 누가 누구의 눈치를 볼 나이도 아니고 그냥 그러고 싶으면 그렇게 하고, 또 싫으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아가는 나이다. 그저.. 그런 마음에 고마움이 전달 되면 더 할 나위 없겠지만.
횡성 KTX역에서 차를 회수하여 함께 텃밭으로 가서, 늦은 가을 자연 속에서 얻은 소박한 반찬으로 함께 저녁을 먹고 그는 다시 집으로 되돌아 왔다.
결론 한마디 하려고 이렇게 장황한 이야기 들을 늘어 놓나보다.
나이가 깊어 감에 소중한 친구를 곁에 둘 수 있는, 친구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고 있는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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